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천 년을 견디는 종이, 한지 장인의 손에서 태어나다

by info-ericson 2025. 7. 28.

종이는 정보를 담는 도구로만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한국의 **전통 한지(韓紙)**는 단순한 종이를 넘어, 천년을 견디는 생명체이자 장인의 숨결이 녹아든 문화재다.
강원도 원주의 산골에서 35년째 닥나무로 한지를 만드는 A 장인은, 기계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종이의 숨결을 매일 새벽 손으로 짜낸다.
이번 콘텐츠는 그 장인의 하루를 따라가며, 종이라는 얇은 물성 속에 담긴 한국 공예의 깊이를 기록한다.
천년을 버티는 종이는 어떻게 태어날까? 그 시작은 지금, 당신의 손끝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 닥나무, 종이가 되기 위한 첫걸음

장인의 하루는 해가 뜨기도 전, 작업장 뒤편에 쌓인 닥나무 더미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장작처럼 엉켜 있는 닥나무 중에서도 오늘 작업에 적합한 것만을 골라낸다.
길이, 굵기, 껍질의 질감, 나이테의 흐름 등을 눈으로 살피고, 손으로 툭툭 쳐보며
소리와 탄성으로 재료 상태를 가늠한다.

“이 나무는 아직 덜 익었고, 저건 물을 너무 머금었어요.
좋은 종이를 만들려면 오늘 쓸 나무는 오늘 판단해야 합니다.”

한지는 종이지만, 그 뿌리는 나무다.
정확히는 겨울 한파를 견뎌낸 닥나무의 속껍질, 즉 **백피(白皮)**에서 시작된다.
12월에서 2월 사이,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시기에 수확한 닥나무일수록
섬유질이 단단하고, 불순물이 적어 한지 제작에 적합하다.

장인은 나무를 물에 적시지 않고 바로 껍질을 벗긴다.
벗겨낸 껍질은 먼저 거피(去皮) 작업을 거쳐 표피를 제거하고 속껍질만을 남기게 되는데,
이 속껍질이 바로 한지의 핵심 소재다.
이 백피는 처음에는 황갈색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은은한 회백색으로 변하며, 고운 섬유의 윤곽이 드러난다.

A씨는 벗겨낸 백피를 그늘진 곳에서 펼쳐 자연 건조시킨 뒤,
다시 물에 담가 부드럽게 만들고, 나무망치로 찧어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이때 이물질이 남으면 종이 위에 점처럼 튀어나오거나, 표면이 거칠어질 수 있기 때문에
장인은 이 작업을 가장 중요한 ‘초정비’ 과정이라고 말한다.

“백피는 사람이 ‘정성’을 얼마나 들였는지 바로 드러납니다. 손이 귀찮아하면 종이도 반응하죠.”

이어지는 과정은 더 섬세하다.
삶기 전의 백피는 맑은 계곡물에 하루 정도 담가 잔이물질을 빼고,
그 다음날 아침, 장작불을 피워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올리고 백피를 넣는다.
여기에 **잿물(재를 우려낸 물)**이나 나무재를 태운 알칼리 성분을 넣어
섬유를 부드럽게 풀어준다. 이 과정을 **삶기(蒸煮)**라고 부른다.

삶는 시간은 보통 3시간에서 5시간 사이이며,
불의 세기, 백피의 두께, 계절마다 그 시간이 달라진다.
온도가 낮으면 섬유가 덜 풀리고, 너무 끓이면 섬유가 끊어져 종이의 내구성이 떨어진다.

장인은 가마솥 옆에서 연기를 맞아가며 수시로 백피의 상태를 살핀다.
“섬유가 부드러워졌는지 손가락으로 찢어보고, 냄새를 맡고, 색을 본다”고 한다.
기계는 온도만 조절하지만, 그는 모든 감각으로 재료를 읽는다.

삶기 작업이 끝난 후에는 백피를 꺼내어 맑은 물로 여러 차례 헹구고,
잡티와 불순물을 손으로 하나하나 골라낸다.
이 과정은 손질(揀擇) 또는 정선(精選)이라 하며,
한지의 ‘결’과 ‘맑음’을 결정짓는 관문이다.

“이물질 하나만 있어도, 종이 뜰 때 걸리면 다 버려야 해요. 하루 종일 고생해도 말이죠.”

이후 다듬어진 백피는 디딜방아 같은 찧기 기계에서
수천 번의 타격을 받아 섬유질로 분해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섬유 반죽은 **‘섬유지’ 혹은 ‘닥지 섬유’**라 불리며,
이 반죽을 물에 풀고, 발지(抄紙) 작업으로 넘어가야 비로소 ‘종이 뜨기’가 가능해진다.

 

이 모든 과정은 기계로도 흉내 낼 수 있지만,
섬유의 분포, 섬세한 감각, 반복되는 손의 리듬은 사람의 손에서만 가능하다.
한 장의 종이는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그것은
나무 한 그루의 시간 + 장인의 감각 + 불의 온도 + 물의 순도 + 기다림이 합쳐진 결과물이다.

 

[3편]천 년을 견디는 종이, 한지 장인의 손에서 태어나다

🔥 삶고 찧고, 섬유를 푸는 시간의 공예

닥나무 백피가 종이로 태어나기 위한 첫 번째 고비는 바로 ‘삶는 과정’이다.
이 작업은 단순히 물에 넣고 끓이는 것이 아니라, 섬유질을 풀고 구조를 재정렬하는 정밀한 공정이다.
A 장인은 이 작업을 ‘종이의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삶는 시간은 평균 3~5시간이며, 사용하는 물의 수질, 불의 세기, 닥의 양, 날씨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가마솥은 대개 황토 가마나 철제 솥으로 되어 있으며,
불은 참나무 장작을 주로 사용하는데, 이때 발생하는 연기와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돼야 한다.

“물을 깨끗한 계곡수로 써야 해요. 염소 섞인 수돗물은 닥나무 섬유를 망칩니다.
불은 눈으로만 보면 안 돼요. 연기 색, 냄새, 솥에 부딪히는 소리로 판단합니다.”

삶는 도중 A씨는 수시로 백피를 꺼내 손으로 쥐어보고, 손톱으로 살짝 찔러보며
섬유의 탄성과 부드러움을 확인한다.
덜 삶으면 섬유가 뻣뻣해서 종이 표면이 거칠어지고,
과하게 삶으면 섬유가 끊어져서 종이의 강도가 떨어지게 된다.

삶기가 끝나면, 백피를 깨끗한 물로 여러 번 헹궈서 잔류 알칼리와 불순물을 제거한다.
이 과정을 소홀히 하면 종이가 누렇게 변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쉽게 부패할 수 있다.
헹군 백피는 일일이 손으로 펼쳐서 광목천 위에 넓게 펴고 반나절 이상 물기를 뺀다.

그 다음 공정은 ‘찧기’다.
찧기는 삶은 닥을 디딜방아 또는 맷돌식 기계에 넣고 수천 번 두드리는 작업으로,
섬유를 고르게 분산시켜 종이에 필요한 점성, 밀도, 탄성 등을 만드는 핵심 과정이다.

A씨는 맷돌 위에 놓인 백피를 손으로 펴고, 맷돌판을 조심스럽게 내린다.
이때 너무 세게 내리면 섬유가 짧게 끊어지고, 너무 약하면 섬유가 덩어리져 풀리지 않는다.

“이 작업이 제일 어렵습니다. 섬유를 그냥 부수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채로 분해해야 하거든요.”

장인은 손끝의 반동, 기계 소리의 떨림, 찌직거리는 섬유 분해음,
그리고 반죽의 변화되는 점도를 동시에 체크한다.
기계는 균일하게 움직이지만, 그 위에 얹은 재료는 매 순간 다르기 때문이다.

찧는 시간은 보통 1시간에서 2시간이며, 숙련도가 낮은 사람은 이 공정에서 가장 많이 실수한다.
실수로 섬유를 너무 곱게 찧으면 종이가 얇고 약해지며, 반대로 거칠게 찧으면 뜨는 과정에서 체에 걸려 찢어지기 쉽다.

“손을 놓고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돼요. 찧는 중엔 내가 이 섬유와 같이 호흡한다는 느낌으로 집중해야 합니다.”

찧기 작업이 끝나면, 반죽은 말캉하면서도 점성이 살아 있는 상태가 된다.
이 고운 섬유 반죽이 바로 **발지(抄紙)**에 사용될 최종 재료이며,
이때의 섬유 상태가 종이의 품질을 좌우한다.

장인은 이 반죽을 손으로 쥐어 짜보면서
“쥐었을 때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듯 흘러야 하고, 물 위에 풀었을 때 고루 퍼지면 성공”이라고 말한다.
너무 끈적이거나 너무 묽으면 다시 찧어야 한다.

🌬️ 바람으로 마르고, 시간으로 완성되는 종이 

발지(抄紙)를 마친 한지 원판은 물을 머금은 채로 조심스럽게 들어올려진다.
이 원판은 아직 ‘종이’라 부르기 어렵다.
표면은 축축하고, 형태는 불안정하며, 손으로 만지면 금세 찢어질 수 있는 섬유 덩어리일 뿐이다.

이 원판을 진짜 종이로 만들어주는 마지막 과정이 바로 건조(drying)이다.
그리고 이 건조 과정은, 기계가 아닌 바람과 시간, 장인의 판단력이 결정한다.

장인은 떠낸 종이를 얇은 천 위에 한 장 한 장 겹쳐 올린 뒤,
널찍한 건조판(종이판)에 옮겨서, 통풍이 좋은 벽면에 수직으로 세운다.
이때 각도가 틀어지거나 종이가 접히면 건조 과정에서 비틀림 현상이 생기며,
완성된 종이가 울퉁불퉁해지거나 찢어질 수 있다.

“햇볕이 강하면 종이 겉은 마르는데 속은 그대로입니다.
그렇게 만든 종이는 몇 년 안에 갈라지죠. 바람이 골고루 불어야 속까지 마르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항상 남향이 아닌, 동향 또는 북향의 그늘진 통풍 창가를 선호한다.
거기에 습도까지 높거나 낮으면 전체를 다시 적셔야 하는 경우도 있다.
자연과의 호흡이 완성되지 않으면 종이도 태어나지 못한다.

일반적인 공장에서 쓰는 열풍 건조기는 빠르고 효율적이지만,
그가 보기엔 “겉은 종이지만 속은 플라스틱 같은 것”이다.
수분이 급속히 증발하면 섬유가 수축하면서 종이 내부의 결이 뭉개지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 바스라지거나 쉽게 찢어지는 얇은 시트가 된다.

A씨는 하루에 많아야 20~30장 정도밖에 만들지 않는다.
그 이상을 만들면 건조 장소가 부족하고, 감각의 통제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많이 만드는 게 아니라, 잘 마르게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3편]천 년을 견디는 종이, 한지 장인의 손에서 태어나다

 

건조가 끝난 종이는 겉보기에 평범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최종 공정 하나가 남아 있다.
바로 종이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고,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작업인 ‘광지(光紙)’다.

광지는 단순한 마감 처리가 아니다.
이 작업을 통해 종이는 빛을 반사하지 않는 은은한 광택을 가지게 되고,
글씨를 쓸 때 먹이 번지지 않으며, 오래 보관해도 쉽게 변질되지 않는 성질을 갖게 된다.

광지는 예전에는 조개껍데기나 호박 가루를 천에 묻혀 종이 표면을 문지르는 방식으로 했고,
지금도 장인은 광목천을 손에 감고 부드럽게 닦아가며 종이의 결을 정리한다.

그는 손으로 광지를 하면서 종이의 거친 결, 미세한 주름, 날숨 같은 파동까지 느낀다고 한다.

🧠 기술보다 ‘결’을 기억하는 손 

한지 장인의 하루는 매일 반복되는 듯 보이지만,
그가 만드는 종이 한 장 한 장은 결코 똑같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의 물이 다르고, 오늘의 바람이 다르고, 오늘의 닥이 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의 장인의 몸 상태와 기분, 손의 떨림까지도 종이에 영향을 준다.

“기술은 손에 익힐 수 있지만, 감각은 눈과 귀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종이를 만든 게 아니라 ‘결’을 기억한 거예요.”

그가 말하는 '결'이란 단순한 섬유 방향이 아니다.
그것은 손의 방향, 흔들림의 습관, 물의 흐름, 바람의 각도, 습기의 농도까지 포함한 삶의 총합이다.
그 결이 살아 있어야 종이도 숨을 쉬고, 시간이 흘러도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

한지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지 오래가는 종이가 아니라, 사람의 손과 감각이 녹아든 결과물이기에
500년, 1000년이 지나도 글씨가 살아남고, 그림이 변하지 않고, 문화가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고서나 옛 문서를 열어보면,
그 안에 쓰인 글씨는 흐려졌지만 종이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종이 한 장은 시간을 이긴 공예이자, 인간의 감각이 기록된 생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