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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옹기 장인의 하루 루틴 – 흙, 불, 숨으로 만든 그릇

by info-ericson 2025. 7. 26.

사람들은 흔히 ‘항아리’를 그저 저장 용기로 생각한다. 그러나 진흙과 불, 바람으로 구워낸 옹기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이 함께 만든 생명체에 가깝다.
경상남도 산청의 외딴 마을에서 40년 넘게 옹기 제작에 인생을 바친 익명의 장인 A씨는 매일 새벽 흙을 만지고, 낮에는 불을 다스리고, 해 질 무렵 항아리의 울림을 듣는다.
이 글은 그 장인의 하루를 따라가며 전통 옹기의 철학과 제작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독자들은 이 글을 통해 흙에서 생명을 빚는 기술의 깊이를 느끼게 될 것이다.

[2편] 전통 옹기 장인의 하루 루틴 – 흙, 불, 숨으로 만든 그릇

🪵 흙에서 시작되는 하루

장인은 매일 아침 6시가 되면 조용히 마당으로 나가 숙성된 황토 흙 더미를 손으로 만져본다.
그의 하루는 손바닥에 닿는 촉감으로 시작된다. 그 촉감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오늘 작업이 가능한지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옹기를 만드는 흙은 그냥 흙이 아니다. 강원도, 경북 북부, 또는 경남 산지에서 채취한 황토
햇빛과 바람, 비를 맞히며 최소 1년 이상 자연 상태로 숙성시켜야만 비로소 사용할 수 있다.
이 숙성 과정에서 불순물이 빠지고, 입자가 고르게 분산되며, 흙 자체가 숨을 쉬게 된다.

A씨는 숙성된 황토를 손바닥에 얹고, 주먹을 살짝 쥐듯 감아본다.
이때 흙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지면 “물을 더 머금어야 할 흙”,
손바닥 안에서 뭉쳐지되 겉표면이 살짝 갈라지면 **“빚기에 적당한 상태”**라고 판단한다.

“흙도 성격이 있어요. 급한 날은 뿔이 나고, 좋은 날은 말을 들어요. 그날에 맞춰 제가 따라가는 겁니다.”

이 말은 우스갯소리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흙은 온도, 습도, 계절, 날씨에 따라
물성이 달라지고, 작업 시간과 방식까지 바꾸게 한다.
장인은 흙의 컨디션을 눈으로만 판단하지 않는다. 손으로 만지고, 물을 섞고, 다시 만지며
온종일 함께 생활하듯 흙을 이해한다.

흙이 너무 건조하면 빚는 도중 갈라지고, 굽는 과정에서 내부에 균열이 생긴다.
반대로 흙이 너무 촉촉하면 형태를 잡아도 금세 무너지고,
물레에서 손을 떼는 순간 푹 꺼져버릴 수 있다.

그래서 장인은 흙을 빚기 전, 반드시 그날의 공기 흐름과 습기, 온도를 가늠한 뒤
오늘 작업할 양을 정한다. 흙의 상태에 따라 많이 만들지 않고, 한 개만 만드는 날도 있다.
수량보다 완성도와 안정성이 우선인 철학 때문이다.

“공장은 정해진 양을 만들지만, 나는 정해진 흙의 기분을 먼저 봅니다. 흙이 ‘오늘은 안 돼’ 하면, 안 하는 거죠.”

장인이 다루는 흙은 단지 형태를 만들기 위한 소재가 아니다.
그 흙은 시간이 담겨 있고, 손의 감각과 자연의 조건이 모두 녹아든 재료다.
A씨는 말한다.

“흙은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에요. 내가 조급하면 흙도 갈라지고, 내가 평온하면 모양도 예쁘게 잡혀요.”

이러한 감각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기계로 측정하거나 자동화할 수 없는 영역이다.
흙을 만지는 그 순간순간이, 장인에게는 하나의 수행이자 일기와 같은 행위인 것이다.

장인은 흙을 다듬은 후, 물을 살짝 뿌려 천으로 덮어 보온하고,
그늘에 하루 이상 놓아 수분이 균일하게 퍼지도록 만든다.
그 과정도 하나의 예술이다. 물의 양이 많으면 곰팡이가 생기고,
덜 뿌리면 흙이 마르기 시작한다.

흙은 단순한 물성과 재료가 아니다.
장인의 하루를 시작하게 하고, 그의 감정을 반영하며,
그릇이라는 결과물을 위한 모든 과정의 시작점이 된다.

🧱 손끝에서 태어나는 곡선

오전 8시쯤 되면 그는 손으로 옹기의 몸통을 빚기 시작한다.
물레를 돌리며 형태를 잡아가는 과정은 마치 무용수의 움직임처럼 유려하다.
속이 비어 있음에도 무게감이 느껴지고, 입구는 좁고 하체는 넓은 전통 옹기의 형태가 만들어지기까지 최소 3시간이 걸린다.

A씨는 “곡선을 손으로 만드는 일은 기술이 아니라 감각”이라고 말한다.
눈금도, 각도기도 없이 그는 손바닥의 넓이, 손가락 마디 수, 팔의 위치를 기준 삼아 형태를 완성한다.
한 번이라도 중심이 틀어지면 전체 균형이 깨지고, 가마에서 터져버릴 수 있다.

“옹기는 보는 그릇이 아니라, 쓰는 그릇이에요. 손에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생명력을 입히는 불, 옹기의 고비

정오 무렵이 되면 빚어진 옹기를 반나절 동안 그늘에서 건조시킨 뒤, 장작 가마로 옮기는 준비를 시작한다.
장작 가마는 전통 방식으로 만든 반구형 흙가마이며, 800도에서 1300도 사이의 온도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장작을 넣는 일은 단순해 보이지만, 가장 까다롭다.
불이 약하면 옹기가 제대로 구워지지 않고, 너무 강하면 옹기가 터져버린다.
A씨는 장작 타는 소리, 연기의 색, 가마 안의 열기 흐름만으로 온도를 조절한다.
온도계도 없고, 타이머도 없다. 오직 감각이다.

“불이 너무 조용하면 안 되고, 너무 요란해도 안 됩니다. 불이 숨을 쉴 수 있게 해줘야 옹기가 살아남아요.”

가마 안에 들어간 옹기는 18~24시간 이상 불 속에 놓여 있게 되며,
그동안 장인은 수시로 장작을 추가하고, 가마의 바람구멍을 조절하며 불의 성격을 바꾼다.

[2편] 전통 옹기 장인의 하루 루틴 – 흙, 불, 숨으로 만든 그릇

🌬️ 완성된 옹기, 그리고 그릇의 울림

다음 날 아침. 가마의 불이 꺼지고 온도가 서서히 식으면, 장인은 조심스럽게 옹기를 꺼낸다.
성공한 옹기는 두드렸을 때 맑은 종소리 같은 울림이 난다.
이 울림이 곧 옹기의 ‘숨소리’다. 장인은 그 소리를 듣고 **“이 그릇은 살았다”**고 말한다.

“옹기는 사람처럼 똑같이 안 나옵니다. 하나하나 다 성격이 달라요. 그래서 재미있죠.”

완성된 옹기는 김치를 담거나, 된장을 저장하거나, 술을 숙성하는 데 쓰인다.
전통 옹기는 단순한 도구가 아닌, 삶과 발효, 생명의 시간을 담는 그릇이다.
그래서 장인은 “내가 만든 옹기는 내가 만든 그릇이 아니라, 흙과 불이 만든 생명”이라 말한다.